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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파인더로 보는 일기

귀하는 서류평가에서 탈락하였음을 안내드립니다.

by 소조씨 2024.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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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치유의 시간을 가져야지

 

정부에서 지원하는 창업지원금을 받기 위해 약 6개월간 영혼을 갈아 넣었던 사업계획서가 서류 평가에서 탈락했다.

 

창업은 이전에 한번 해 봤는데, 그 때는 정부지원금이 아니라 내 퇴직금을 모두 투자했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그 사업을 꽤나 성공적으로 운영했고, 꽤 오래 유지했다. 당시 내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수익 또한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사업을 그만 둔 것도 그냥 내가 일에 질려 그만두고 싶어서 그만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사업을 접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 후에도 나는 언제든 다시 내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저 내 선택으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당연스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두번째 사업을 한다면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없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나는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에 심취했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더 큰 수익을 얻는 법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 방법은 대체로 창업으로 귀결된다. 지금 당장 사업을 시작해야 더 큰 수익, 더 많은 권한,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책들은 말했다. 사실 나는 그간 창업 생각은 꾸준히 하고 있기는 했지만 열망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 매우 만족했고, 내 직업이 너무 좋았으며, 직장 생활도 꽤 잘 맞았다. 하지만 당시 읽는 자기계발서들이 모두 나에게 사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으니, 나도 자연스럽게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기는 싫었으므로 사업은 사이드잡으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다 사업 아이템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보이는 것들을 리스트로 정리해 사업성이 있는지 장, 단점을 매기며 평가했다. 하지만 진짜 마음에 꽂힌 아이템은 따로 있었다. 건강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계시를 받듯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이건 그냥 무조건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당장 노트를 꺼내서 아이디어를 적어 내려갔는데, 서너장을 꽉꽉 채우고도 남았다. 이전까지 수많은 사업 아이템 리스트를 열심히 분석한 것이 무색하게 바로 그 아이템으로 진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업은 첫번째와 달리 판을 좀 키워서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부지원사업을 떠올렸다. 정부지원사업은 최대 1억원까지 지원을 해 주기 때문에 선정만 된다면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걸 정말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딱 마침 이 사업과 관련해서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 전문성을 가진 친구가 주변에 있었다. 친구도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함께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그 날로 우리는 공유 문서를 만들어서 사업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OKR도 설정하고 각자의 비전도 작성하고, 업무 일정표도 만들고, 구성원의 프로필도 작성하고 나니 꽤 그럴듯했다. 우리가 만들 회사의 브랜딩을 시작하고, 시장 조사와 설문조사, 고객분석 같은 작업들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진짜 무언가 되고 있었다. 우리는 매주 2회 온라인에서 회의를 진행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이미 한 일들을 회고했다. 갑자기 잡힌 야근이나 회식으로 인해 회의를 제끼거나 미루는 날도 생기고, 퇴근하고 나서 또다시 일을 하기 싫은 날도 많았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템은 무조건 될 것이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확신이랄까.  

 

사업을 누군가와 같이 하게 되면 무조건 갈등이 생기고 결국엔 파국을 맞게 된다는 얘기가 흔히 있다. 우리가 함께 사업을 하기로 했다고 주변에 알리자 하나같이 그런 얘기를 들려줬다. 우리는 사이가 좋았고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자꾸 그런 얘기를 들으니 괜히 걱정이 앞섰다. 본격적으로 회사가 설립된 것도 아니고 투자를 받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의견이 다를 때면 진득하게 대화하며 합의점을 찾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앞뒤 상황을 설명하고 상대방의 이해와 동의를 구했다. 물론 지원사업에 통과하고 사업을 시작해서 수 년이 지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함께 일한 기간 동안만큼은 꽤나 잘 맞는 사업 파트너였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약 6개월을 열심히 준비해 약 15페이지의 사업계획서가 완성되었고 나는 제출하는 순간까지, 아니 발표가 나는 순간까지도 무조건 통과라고 믿었기 때문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보완해서 다른 사업에 또 지원해봐야 할까? 아니면 다른 아이템으로 다시 구상해 볼까? 하지만 준비하는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은 탓인지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다. 오히려 개운한 느낌이다.  이제야 삶에 다시 안정을 찾은 듯한 기분도 든다. 퇴근하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있는 삶은 열정 넘치고 보람차지만 사실 꽤나 지치고 피곤하다. 약간은 후련한 지금, 사업 욕구마저 사그라든 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소홀했던 본업에 더 집중하고, 퇴근 후에는 마음 편히 쉬면서 취미 생활도 이것 저것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다.

 

서류평가에는 탈락했지만 사업 계획서 작성에는 이제 빠삭해졌고(떨어졌으니 빠삭한 게 아닌가?)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의 경험치를 얻었고, 또 너무 좋은 사업 파트너를 알게 되었고, 갈등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방법을 체득했고, 직장의 소중함도 깨달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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